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지간테 (문단 편집) ==== 1981,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됨 ==== 1981년 70대 고령의 필립 롬바르도가 은퇴하면서 53세의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됨과 동시에 마피아 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 시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두목 롬바르도는 [[뉴욕 대학교|뉴욕대학교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뇌졸중]]을 겪은 부두목 [[앤서니 살레르노]]도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본래 살레르노는 상담역(Consigliere) 지간테와 더불어 유력한 차기 두목 후보였으나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아 그 뜻을 단념했다. 당시 지간테는 패밀리 내 유력 지부장인 [[https://i.pinimg.com/originals/58/9a/13/589a139c2f31ddf14880217896730547.jpg|사베리오 산토라]], [[https://i.pinimg.com/originals/d9/4a/6f/d94a6f60d35fc27914b66b294946d5e6.jpg|루이스 만나]]와 함께 그들의 병문안을 갔고 그곳에서 공식적인 승계가 이루어졌다. 두목이 된 지간테는 산토라를 서열 2위인 부두목, 만나를 서열 3위인 상담역으로 임명했다.[* 부두목 산토라는 1987년에 사망하여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e/Mangano%2C_Venero_Frank_-6-_small.jpg|베네로 망가노(Venero Mangano)]]가 그 뒤를 이었다. 상담역 만나는 1989년에 2건의 살인교사2건의 살인공모공갈 혐의로 8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en/8/8f/James_Ida_%28surveillance_photo%29.jpg|제임스 아이다(James Ida)]]가 그 뒤를 이었다. 아이다 역시 1997년에 여러 살인교사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그 뒤를 [[:파일:Lawrence Dentico.jpg|로렌스 덴티코]]가 이었다.] 살레르노는 서열 1.5위 격인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아 지간테의 승계를 대외적으로 위장했다.[* 본래 살레르노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 은퇴를 선언하고 [[뉴욕 주]]에 위치한 자신의 말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한평생 음지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아온 그에게 전원생활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분했다. 결국 그는 측근인 빈센트 카파로를 [[뉴욕 시]]로 보내 지간테에게 자신의 복귀를 허가받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지간테가 살레르노의 복귀를 허가했고 그를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활용한다. 당시 지간테는 카파로에게 만약 살레르노가 패밀리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마피아_위원회_회합_승계설 상술한 [[뉴욕 대학교|뉴욕대학교병원]] 승계설은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빈센트 카파로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는 살레르노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1980년대 패밀리 내 권력 투쟁을 생생히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카파로의 증언은 가장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받으며 2016년에 출간된 지간테의 [[전기물|전기]]에도 뉴욕대학교병원 승계설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파일:새미 그라바노.jpg|살바토레 그라바노]]는 알려진 것과 다소 차이가 있는 [[마피아/용어|마피아 위원회]] 회합 승계설을 주장했다. 그라바노에 의하면 살레르노를 후계자로 지명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임 두목이 살레르노보다 훨씬 세력이 강한 지간테가 무력으로 패밀리를 장악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지간테에게 살레르노를 살해하지 말 것을 부탁하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두목 자리를 승계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얼마 뒤 행동대원 신분의 그라바노가 마피아 수뇌부의 경호를 위해 참석한 위원회 회합에서 지간테가 공개적으로 살레르노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살레르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승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두 가설을 절충하면 제노비스 패밀리 내부에서 승계가 이루어진 장소는 뉴욕대학교병원이 맞으나 대외적으로 승계를 공식화 한 장소는 위원회 회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살레르노는 지간테보다 17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이자 마피아 세계의 선배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나마 살레르노가 지간테에게 두목 자리를 승계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위원회가 소집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약 36년 동안 조직 생활을 하며 온갖 수라장을 헤쳐온 뒤 비로소 암흑가의 정점에 오른 빈센트 지간테는 음산한 분위기와 위협적인 기질로 악명 높았고 극단적인 폭력과 기만으로 무장한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매서운 시선은 담판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범죄활동을 조력하는 4명의 형제가 있었다. 형 [[:파일:Mario Gigante.jpg|마리오 지간테]]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로, 조직 내에서 동생을 보좌했다. [*마리오_지간테 1950년대 중반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된 마리오 지간테는 소싯적 빈센트 지간테와 함께 여러 마피아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리오 지간테는 1957년 [[프랭크 코스텔로]] 총격 사건 다음 날 유력 용의자인 빈센트 지간테의 형이라는 이유로 그의 몸을 수색하려 한 [[뉴욕 경찰국|NYPD]] 수사관을 폭행하여 벌금 25달러를 선고받는 등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했으며 능숙한 강도 솜씨로 일명 그림자(The Shadow)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마리오 지간테는 1970년대에 연간 110만 보루 이상의 담배를 밀수했다거나 연간 5000만 달러 규모의 스포츠도박 사업을 관리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재판에서 모두 승소했다. 특히 폐기물관리업계에 깊이 관여한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지부장이 되었고 1981년에 동생이 패밀리의 두목이 되자 조직 내 최고소득자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983년에 대규모 고리대금업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화당(미국)|공화당]] 소속 [[미국 상원|연방상원의원]]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5/Alfonse_D%27Amato.jpg|알폰스 다마토(Alfonse D'Amato)]]가 [[루돌프 줄리아니]] 연방검사장에게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이 무겁다는 항의 전화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은 6년으로 감형되었는데, 당시 열성적인 변호인 측과 대조적으로 검찰 측에선 특별한 의견 표명을 하지 않는 등 감형을 수수방관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훗날 마리오 지간테의 변호인 [[로이 콘]]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줄리아니와 재판관에게 로비를 했다는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된다. 이에 한 관계자는 줄리아니가 마리오 지간테의 감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히며 법원에 항소가 계류 중이던 1984년 9월부터 1985년 1월 15일까지 줄리아니와 콘이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1984년 9월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난 적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답변을 회피했다.[[https://books.google.co.kr/books?hl=ko&id=WzuzPiXD2LgC&dq=%22Mario+Gigante%22&q=Mario+Gigante#v=onepage&q&f=false|#]] 당시 두목의 형인 마리오 지간테를 구제한 대가로 콘에게 17만 5천 달러를 전달했다고 주장한 마피아 변절자 빈센트 카파로의 증언으로 로비 혐의를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정식 기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빈센트 지간테는 부하 조직원들 중 [[혈연]]관계인 마리오 지간테를 가장 신뢰했고 훗날 부재중인 자신을 대신해 패밀리 사업을 감독하는 두목 대행(Acting Boss) 직책을 그에게 맡긴다. [[:파일:Gigante Brothers.gif|빈센트 지간테를 수행하는 마리오 지간테의 모습(gif).]]] 큰형 [[:파일:Pasquale Gigante.jpg|파스칼레 지간테]]와 동생 [[https://i.pinimg.com/originals/ae/47/e1/ae47e1227fe5123c29f91045797fcb54.jpg|랄프 지간테]] 역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두목이 된 형제를 보좌했다. [*파스칼레_지간테와_랄프_지간테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출신의 파스칼레 지간테는 198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14전 9승 3패 2무의 전적을 가진 웰터급 권투 선수 출신의 랄프 지간테는 1994년에 [[에이즈]]로 사망한다. [[https://i.pinimg.com/originals/de/ee/21/deee21cea8aa1171114e55ef9911d487.png|빈센트 지간테와 랄프 지간테의 모습.]]] 막냇동생 [[https://www.gettyimages.dk/detail/news-photo/father-louis-gigante-brother-of-the-mafia-boss-gigante-news-photo/97264419|루이스 지간테]]는 [[신부(종교)|가톨릭 신부]]이자 [[미국 하원|연방하원의원]] 선거에도 출마한 뉴욕시의원으로, 자신의 형에게 광범위한 종교적정치적 후광을 안겨줄 수 있었다.[* 상술한 1970년대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에 제노비스 패밀리가 개입한 게 사실이라면 당시 두목 [[:파일:Philip Lombardo.jpg|필립 롬바르도]]의 입장에서 성직자 동생이 있는 빈센트 지간테를 사업을 관여시키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루이스 지간테는 빈곤층을 위한 공공아파트 건설 사업을 주도하는 SEBCO란 단체를 결성했고 SEBCO는 지간테 가문의 프런트회사 겸 [[돈세탁]] 창구가 되었다.[* 루이스 지간테와 SEBCO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문서 하단 여담 문단 참고.]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마피아 세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루이스 지간테는 언론에 빈센트 지간테의 입장을 전달할 일이 생기면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외에도 빈센트 지간테에겐 일명 4인의 돔(The four Doms)이라 불린 측근 그룹이 존재했다. 이 그룹은 도미닉이란 이름을 가진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로 구성되었는데 대머리 돔 [[https://i.pinimg.com/originals/c6/7e/fb/c67efbbe8859d139fd4e4927c2baf44d.jpg|도미닉 칸테리노]], 과묵한 돔 [[도미닉 시릴로]], 뱃사람 돔 [[https://i.pinimg.com/originals/43/d1/7a/43d17a1d34a9a5295599ed2f8777024f.jpg|도미닉 디콰르토]], 뚱뚱한 돔 [[:파일:Dominick Alongi.jpg|도미닉 알론지]]가 그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